실패할지라도 이 움직임은 춤이 될수도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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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실패할지라도 이 움직임은 춤이 될수도 있을 것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아주 비어버린 것이 아님을 확신하며

기사입력2024-07-12 14:53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위해 한 전시장을 대관했다. 정확히 말하면,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오래된 아파트를 하루 빌렸다. 이곳의 이름은 ‘IMF 서울’이다. IMF 서울은 1997년 매입한 아파트였으나 여러 이유로 수년간 사람이 살지 않는 채 방치되어 있었다. 아파트 소유자의 가족이 이곳을 전시공간으로 운영하기 시작했고, 올해 4월 첫 전시를 열었다.

긴 시간 동안 비어있었다는 설명을 읽었기 때문이었을까? SNS 계정에 올라온 사진을 통해 이 공간을 처음 봤을 때 묘한 느낌을 받았고, 이곳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거주 공간은 본디 사람이 살고 그들이 안락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방치된 채로 아무 것도 살지 않는(제 쓸모를 다하지 못하는), 금융위기의 실패들을 떠올리게 하는(예컨대 연쇄 도산, 대량 해고, 파산을) 이 묘한 곳에 강하게 이끌렸다. 프로젝트를 위해 무언가를 촬영해야 했는데, 그 ‘무엇’을 정하지 못해 초조한 마음이 들던 차였다.

대관을 약속하고 며칠간은 불면에 시달렸다. 이제까지 촬영한 영상이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 좋은 기회로 연구 지원금을 받아 작업과정에서 드는 실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기회비용에 못 미치는 실패한 결과물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매일 마음에 빚이 쌓인다.

실패의 원인은 명확하고 나름의 분석을 해서 해결방법도 찾았다. 노출계가 고장 나서 빛을 많이 받은 부분이 과하게 밝게 기록되었다(해결방안은 온전한 카메라를 사는 것이다). 초점이 맞지 않아 찍힌 것의 형상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흐릿한 이미지를 얻었다(필름에 담긴 장면은 현상하기 전까지 확인할 수 없기에 카메라에 더 익숙해지거나, 눈을 믿지 않고 측량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원하는 장면을 마음껏 촬영하고 실험하기에 필름은 너무나 귀하고 찍고 싶은 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데….

IMF 서울. <촬영=박선호>

불평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프로젝트의 설계가 잘못된 거였을까?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내게 주어진 ‘작업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고, 과정에서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공간을 충실히 담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촬영을 준비했다.

6월이 금세 다가왔다. 초여름의 기운이 감도는 아파트 주차장에 내렸다. 촬영장비를 챙겨 공동현관으로 들어오니, 오래된 벽면에서 나온 차가운 기운이 팔 끝을 맴돌았다. 8인승이라 써진 엘리베이터는 나와 다른 두 사람이 올라타니 가득 찰 정도로 비좁았고, 전광판의 빨간 숫자가 가리키는 곳에 내려 문 앞에 도착했다.

스산한 느낌. 두리번거리며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느껴지는 텅 빈 집. 가구도 없고, 가족사진도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살아본 곳에 온 것만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금성사’에서 나온 인터폰이 보인다.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이 기계가 걸린 벽은 잔잔한 무늬벽지가 붙어 있었고 내 몸의 형상이 비치는 오로라 빛 PVC 바닥재가 눈에 띄었다. 거실 왼편에는 큰 베란다 창문이 보이고, 그 창 너머에는 아파트 옆 동이 보였다. 타일 바닥이 깔린 베란다에는 말라붙은 벤자민 나무가 심어진 화분과 작은 야자나무 화분이 놓여있고 하수구 한켠에 작은 괭이밥이 자라고 있었다. 온기가 없고 열기만 남은 이곳에서 어떤 시간의 층들을 느낄 수 있었다. ‘느낌.’ 손에 잡히는 것이 많이 없었기에 느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번 촬영에서는 세 대의 카메라와 세 종류의 필름을 가져갔다. 모든 카메라에는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손에 카메라를 쥐고, 텅 비어버린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이곳을 천천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여전히 무엇인가가 존재하듯이. 카메라 화각이 좁은 탓에 이곳을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최대한 많은 부분을 꼼꼼히 기록해 보려고 했다. 터진 몰딩이 씌워진 공간의 모서리를 훑어내리며, 벽지에 새겨진 분홍색 꽃의 종류를 궁금해하며. 거의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아주 비어버린 것이 아님을 확신하며. 이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한 부분이 저마다의 삶 속에서 보았던 장면과 겹칠 것이라 확신했다.

촬영을 마친 뒤 프로젝트의 기록을 도와준 친구는 내게 “촬영하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어”라고 말했다. 어쩌면 실패한 공간, 어쩌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촬영. 비록 어느 한 방향에서 실패했을 지라도 이 움직임은, 이 공간은, 아마도 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현상한 필름 속 장면은 역시나 아직 흐릿하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