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바라볼 수 있는 시간…앞으로도 많이 있을까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그저 바라볼 수 있는 시간…앞으로도 많이 있을까 특별한 것 없는 장면들, ‘태양 방향’으로 가만히 시간을 보냈던 순간들

기사입력2024-08-17 09:0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다. 여름에는 모름지기 따가운 태양을 피해 그늘을 찾고 얼음이 들어간 시원한 음료를 마셔야 하는데 말이다. 기후위기로 인해 앞으로 우리는 그동안 경험했던 날씨와는 다른 하루하루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날씨가 변하면 우리가 보는 풍경 역시 변할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라는 시간의 단위가 점점 흐릿해진다. 뉴스를 통해 한국에서도 바나나, 파인애플, 패션 프루츠와 같은 열대과일이 열매를 맺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날 중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일 것이라고 한다.

새싹, 꽃, 단풍, 눈. 계절을 흠뻑 느낄 수 있는 것들과 앞으로도 줄곧 만날 수 있을까. 며칠째 비가 내린다. 얼마 전에는 노란 색깔 우산을 새로 샀고, 사람들과 우산이나 장화 혹은 우비 이야기로 스몰토크를 한다.

신년에는 동료들과 올해의 목표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누군가는 ‘매일 운동하기’, 또 다른 누군가는 ‘운전 연수 받기’라고 말했다. ‘영어 공부하기’, ‘취미 계발하기’처럼 현대인에게 필요한 여러 미덕이 오갔다. 올해의 목표 정하기? 참으로 간단하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사계절의 기쁨을 느끼기’라고 말했다. 자연의 싱그러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여유를 찾고, 생활과 일 사이에서 균형 잡힌 날들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신년 다짐을 말한 후 자연과 계절 그리고 하루하루를 더 많이 신경 쓰게 된 걸까?

이제까지 봐온 계절의 다양한 모습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되고, 매일매일을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이 커진다. 당연한 것들을 볼 수 없게 될 때. 언젠가 미래에 찾아올 그 상실에 대비하기 위해.

<촬영=박선호>

월초에 며칠간 해안가에 머물렀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시간을 냈다. 그저 바다를 보고싶다는 마음으로 바닷가 근처에 지어진 숙소를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침대를 마주 보는 벽면에 커다란 창이 있고 창밖이 옥색 바다가 일렁이는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바다 외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처럼 보였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 보고 싶었다. 늦은 오후 비행기에서 내려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다. 바다 인근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숨을 골랐다. 건물 입구에서는 쌉쌀한 향기가 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었고, 짐을 내려놓으며 ‘풍경은 정말로 사치스럽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얗고 높은 방에는 햇빛이 가득 들어왔고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해가 뜨고 지는 장면을 촬영하기로 결심했다. 하나의 풍경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다, 땅, 하늘. 이것들에 직접 흔적을 남길 수 없으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을 남겨 찰나의 순간을 흔적처럼 남기고자 했다.

첫날, 나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일기예보에서 확인한 일몰 시각쯤에서 해가 지길 기다렸다. 혹여나 해가 저무는 장면을 놓치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언제 셔터를 눌러야 할지 고민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를 누르고 필름 한 롤이 끝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 어쩐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새삼 태양을 이렇게 오랜 시간 바라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태양 빛에 눈이 조금 부셨다.

이왕 해가 지는 것을 찍었으니 해가 뜨는 장면도 찍어볼까 해 오전 다섯 시에 알람을 맞췄다. 이른 새벽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니 창밖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얼마 후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카메라 매뉴얼을 다시금 들춰보며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수면 위에 빛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고 하늘이 다채로운 빛깔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저 한 장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도 많이 있을까. 구름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고 또다시 가만히 기다렸다. 며칠 후 현상을 맡기고 받아본 영상에는 그저 그 시간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특별한 것 없는 장면들. 그러나 언젠가 태양 방향으로 가만히 시간을 보냈던 순간이 문득 내게 다시금 떠오를 것만 같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