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반복적인 행위와 일상…그림에 앞서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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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작가의 반복적인 행위와 일상…그림에 앞서는 삶 박준형의 ‘타임라인 드로잉’…매일의 시간을 추상화해 옮겨 놓다

기사입력2024-06-14 10:00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박준형, ‘타임라인 드로잉(220328~220329)’, 2022, 종이에 연필, 먹, 수채, 구아슈, 색연필, 아크릴릭, 36×26cm.

뭣도 모르고 예술대학에 입학했던 20대 초반에는 ‘작업’이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멋지게 들렸다. 주위 동기나 선배들은 자신이 ‘예술’이나 ‘창작’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너 요새 무슨 작업해?” 왠지 세련된 예술적 은어처럼 들렸던 그 말을 나도 은근히 따라 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작업’이 단지 멋스러운 은어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의 어떤 역사를 담은 표현이라는 점이었다.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은 저서 ‘미술노동자’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미술노동자연합의 이야기를 조망했다. 1960년대 후반, 뉴욕의 개념미술가 몇몇을 중심으로 결성된 미술노동자연합은 미술인을 노동자로 재정의하고자 했다. 그들은 미술이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미술계 그리고 미술과 관련된 공공영역의 변화를 촉구했다. 미술노동자연합은 뉴욕현대미술관장과의 대화를 요구했고(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청회를 조직해 토론했다. 이들의 논의 속에서 미술은 창조성, 혹은 천재성이라는 사탕 껍질을 벗고 일(work), 나아가 노동(labor)이라는 영역에서 가시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술이 곧 노동이라는 생각은 단순한 희망에 불과했던 것 같다. 미술노동자연합의 주축이 되었던 미술가들은 시간이 지나 그들이 비판했던 대형 미술관과 공모하는 주체가 되었고, 예술은 노동이라는 낱말을 오히려 집어삼켰다. 오늘날 후기산업사회는 노동을 노동이라고 지칭하기 꺼려하고, 노동자를 개별화한다. 여기서 예술가가 보여주었던 ‘작업’의 스타일은 노동자를 개별화하는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제 노동자는 마치 예술가와 같이,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주체로 비추어진다. ‘창의 노동’과 같은 또 다른 사탕 껍질을 씌우는 데 예술이 기여한 것이다.

그렇지만 박준형의 ‘타임라인 드로잉’ 연작을 보았을 때, 작업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타임라인 드로잉’은 작가가 겪은 매일의 시간을 추상화해 옮겨 놓은 드로잉이다. 한 시간 단위로 나뉜 시트에는 그가 경험한 하루가 촘촘하게 채집되었고, 그렇게 시각화된 시간은 수십 장씩 모여 하나의 연작으로 전시공간에 설치되었다.

타임라인 드로잉(170207~170811), 2017, 종이에 콜라주, 수채, 먹, 색연필, 78장의 드로잉, 가변설치, 각 21×14.8cm, 사진:박다빈.

한 장의 종이가 한 시간이라는 단위로 분할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가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다. 연필과 수채화, 먹, 아크릴 물감 등 다양한 재료가 뒤섞인 평면을 보고 있으면 짐짓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하루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함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엔 어디까지나 규칙이 있고 제한이 있다.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살아낸 하루를 복기하고, 숙고하고, 반복적으로 기호화한다. 조금씩의 차이를 허용하면서도 큰 틀 안에서 반복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타임라인 드로잉’은 노동의 형식을 닮았다. 작업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었던 건 아마도 그 때문이다.

예술이 단지 예술로만 머무르지 않고 노동으로, 나아가 삶으로 넓어질 수 있으리라 여겼던 시대가 막을 내린 듯 느껴지는 오늘, 박준형의 작업을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형태라기보다는 행위다. 과거 미니멀리스트 예술가들은 작업을 수열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노동의 효과를 의태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상품화되었고, 노동 역시 의미를 잃고 꾸밈말 같은 것이 되었다.

‘타임라인 드로잉’은 언뜻 보기에 색색의 형상으로 가득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자체보다는 그림을 나누고 있는 그리드에 눈길이 가고, 그리드를 매일 채워야 하는 작가의 반복적인 행위와 일상을 상상해 보게 된다. 이 드로잉을 본다는 건 작가의 삶을 본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일상은 분명 어떠한 반복 속에 있을 것이고, 그러한 반복 속에서 ‘창작’은 예외적인 의미를 얻는다.

이러한 삶을 통해 작업은 다시 ‘작업’과 같은 의미를 얻을 수 있을까? 그의 작업은 수년째 이어져 오고 있고, ‘타임라인 드로잉’의 하루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처럼 누적된 시간은 분명 어떠한 의미에 이를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